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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2017
  • 오리진 1. 보온
    윤태호, 이정모 (지은이), 김진화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교양의 이유를 묻는 새로운 교양만화의 탄생"

    <미생>의 윤태호 작가가 교양만화를 그린다! 100권에 이르는 대형 시리즈다! 그리고 첫 권 주제가 ‘보온’이다! 윤태호 작가가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을 탐구하겠다며 시작한 ‘오리진’을 두고 놀라운 소식이 연이어 도착했다. 그의 목표와 지향이 지식과 정보를 깔끔하고 흥미롭게 전하는 교양 만화가 아니라는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나, 미래에서 온 로봇과 망한 과학자가 만나는 이야기로 생명의 기원과 전개 그리고 미래를 함께 담아내며 이야기를 시작할 줄은 몰랐고, 연재를 읽으면서도 ‘보온’이라는 주제를 어떻게 풀어낼지 궁금증이 풀리지 않았다.

    책은 1부 오리진 만화와 2부 오리진 교양으로 구성된다. 1부에서는 로봇 '베타'가 사람들을 겪으며 열의 의미와 보온의 중요성을 깨닫고 비활성화되었던 생각 ‘연민’을 깨우는 과정이 그려지는데, ‘봉투’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으며 “같은 따스함이면 같아질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남긴다. 2부에서는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이 생명의 탄생과 진화에서 열과 보온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지구 온난화로 이야기되는 지구의 보온은 어떤 상황인지 설명하며, 인류, 생명, 지구라는 관점에서 보온을 들여다본다.

    지식의 양보다는 지식의 이유를 묻고 답을 찾고자 하는 관점이 눈에 띄고, 그것으로 어떻게 성숙하며 살아갈 것인지 되묻게 하는 힘이 드러나는 출발이다. 시리즈는 에티켓, 돈, 상대성이론, 지도, 노화 등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세상 모든 것의 기원'에서 시작한 시리즈가 꾸준히 이어져 '오리진의 결말'을 보게 되길 기원한다.

  • 이제 와서 날개라 해도
    요네자와 호노부 (지은이), 김선영 (옮긴이) | 엘릭시르 | 2017년 8월 "젊음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2001년에 처음 발표된 고전부 시리즈는 올해로 17년차에 이르렀다. 물론 고전부원들은 아직 고등학생이다. 고교생들의 시간은 느리게 흐른다. 어쩌면 작가가 종결을 선언하는 그날까지 이 사랑스러운 캐릭터들과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을까. 소년 탐정 코난이나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에 등장하는 형사들처럼 말이다. 그러나 고전부의 시간은 느리긴 해도 확실히 흘러가고 있다. 이번 단편집은 주인공들이 고교생활에서 맞는 두 번째 여름까지를 다룬다. 고교생활의 절반이 지나간 셈이다. 여기까지 오는 데 17년이 걸렸으니까 현실 세계(?)에서 앞으로 17년쯤 더 지나면 호타로와 친구들은 졸업할지도 모르겠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만.

    사람은 나이가 들 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것처럼 느낀다고 한다. 고교생들은 아직 젊어서 이들의 시간은 상대적으로 느리게 흐른다. 이 어리고 젊은 친구들은 아직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 지 확신하지 못한다.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고 그 가능성들이 서로 얽히면서 이들의 현재를 두 배 세 배로 증폭시킨다. 현실은 여러 가능성의 숫자만큼이나 여러 차례 체감된다. 스스로의 변화를 감지하고 그 변화의 가능성 앞에서 망설이는 고전부원들은 이제 새롭게 발견한 과거와 오늘 해야 할 결심과 그 결심들이 초래할 미래들을 모두 떠안은 채 느린 발걸음을 내딛는다. 입학한 뒤로 겨우 일년 반이 지났을 뿐이지만 고전부원들은 모두 겉보기와는 달리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다. 어쩌면 생각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버릴지도 모르는, 아직 다 만들어지지 않은 '나'의 오늘이 그렇게 짧을 수는 없겠다. 고전부의 독자들은 이 고민들을 오래도록 함께 바라봐오고 있다. 우리의 어떤 일 년도 마치 십 년처럼 많은 것들을 감당해 왔던가를 생각하면서.

    시리즈의 전개에 대한 이야기가 길었지만 고전부는 여전히 고전부의 본분을 지키고 있다. 추리소설의 고전적 플롯을 충실히 따르는 단편들이 깔끔한 전개에 담겨 있고, 사건 틈틈이 펼쳐지는 풍경과 단상들은 조금 지친 주인공들을 쉬어가게끔 돕는다. 이 시리즈는 확실히 자신의 스타일과 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오고 있다. 이대로 아주 오래 호타로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
    오즈 야스지로 (지은이), 박창학 (옮긴이) | 마음산책 | 2017년 8월 "전설적인 명감독이 남긴 글들"

    오즈 야스지로는 생전에 많은 글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는 전설적인 명감독 오즈 야스지로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특히 소중한 책이다. 우선은 수필들이다. 짧은 시간에 써내 신문에 실은 단상들, 군인으로 징집돼 중국에서 지내며 쓴 일기들이 책의 전반부를 구성한다. 감상에 함몰되지 않고 자신이 관찰하는 세계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오즈의 스타일을 글에서도 느낄 수 있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도, 더러운 음식을 먹으며 강행군을 계속하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오즈 특유의 거리감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여담이지만 그의 전쟁 중 일기에는 조선인과 지나(중국)인 위안부들이 언급된다. 불현듯 어두운 역사가 확 밀려오는 순간이다. 오즈가 1930년대에 신문에 쓴 단상들이 더없이 말끔했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한다.

    2부라고 할 수 있는 책의 나머지 절반은 그의 본진이라 할 수 있는 영화와 연결돼 있다. 우선은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에 대한 자기자신의 단평들이 독자들을 맞이한다. 꽤 유쾌하면서도 냉소적인 데가 있다. 그가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던 연출과 그렇지 않은 연출들을 보면서 독자들 자신의 평가를 그와 견주어보는 것도 재미있다. 그러고 나면 (보통 '동경 이야기'라고 많이들 쓰는) 영화 '도쿄 이야기'의 감독용 각본을 만날 수 있다. 실제 영화와 차이가 꽤 있어서 감독이 어떤 이야기를 왜 들어내고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다. 위대한 영화의 각본을 소장한다는 즐거움은 기본이다. 꼭 현재 오즈 야스지로의 팬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사랑하거나 사랑하고 싶은 독자들은 이 책을 꼭 접해보기 바란다. 언제 그의 영화를 접하게 될 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영화를 좋아하면서 오즈 야스지로를 싫어하기는 무척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김보통 (지은이) | 문학동네 | 2017년 8월 "김보통씨의 퇴사 이후의 삶에 관하여"

    <아만자> <DP 개의 날> 김보통 작가가 이번에는 만화가 아닌, 생애 첫 에세이로 독자들 앞에 섰다. 그는 만화가가 되기 전, 대기업 회사원으로 4년을 지냈고, 퇴사 후에는 퇴사자 김보통씨로 살았다. 책은 불행에 가까운, 퇴사 이후의 시간과, 만화가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들에 관한 진솔한 기록이다.

    IMF로 망해버린 가난한 집안의 맏아들이었던 작가에게 아버지는 '대기업에 가야 사람처럼 살 수 있다' 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소원을 마침내 이뤄냈으나, 4년 후 아버지는 암으로 돌아가시고, 그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대책 없이 퇴사했기에 막막하고 외로운 나날들을 보내며 방황했다. 작가는 긴 방황의 여정과 그 안에서 느꼈던 감정들을 진솔하게 들려주고, 마침내 그가 깨달은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고백하며 글을 맺는다. 수많은 이들이 입을 모아 '너는 망할 것이며 결국 불행해질 것이다'라고 예언했지만, 다행히 대한민국의 보통사람 김보통씨는 아직도 불행하진 않다고.

9.52017
  • 다른 사람
    강화길 (지은이) | 한겨레출판 | 2017년 8월 "그날처럼. 남자친구가 내 목을 졸랐다 "

    김진아. 직장 상사이자 완벽한 남자친구였던 그에게 다섯 번째 폭행을 당하고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가 받은 처분은 벌금 300만원. 처벌은 납득할 수 없고, 자신을 폭행한 남자친구가 직장 상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사건에 대해 인터넷에 올린다. 처음엔 그를 응원하던 이들. 그러나 김진아가 데이트 비용을 한번도 낸 적이 없으며, 명품 선물을 받기도 했다는 직장 동료 김미영의 폭로 이후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진다.

    김진아는 거짓말쟁이다. 진공청소기 같은 년. @qw1234

    수많은 악의적인 댓글 속, 자신의 과거를 아는 듯한 댓글 하나를 발견한 후 김진아는 12년 전을 향해 침잠한다. '정말 나는 형편없는 인간일까', '모두 알지만 나만 모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게 김진아는 '진공청소기'라는 악명으로 유명했던, 죽은 친구 '유리'에 관한 기억속으로 향한다. 데이트 폭력을 당하고, 악의적인 소문에 휩싸이고, 성희롱 고소를 하고, 성병 치료를 하는 사람들, 여자들. "강간당하느니 차라리 강간하는 인간이 되고 말겠다"고 말하는 이들,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이들이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시대의 어떤 모습들을 담담하게 서술한다. 인상적인 첫 소설집 <괜찮은 사람>을 통해서도 여성으로 살아가는 어떤 순간들의 불협화음에 관해 말했던 작가 강화길이 이 첫 장편으로 2017년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다.

  •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헤드 (지은이), 황근하 (옮긴이), 이지선 (북디자이너) | 은행나무 | 2017년 9월 "두 세기 전, 비밀 지하철도가 있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은 꽤 우스꽝스러운 오해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가 19세기 미국에서 노예들을 탈출시키는 활동을 했던 비밀 단체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말 그대로 '레일로드'가 실제로 존재한 줄 알았다는 것이다. 19세기 미국의 지하에 건설된 비밀 철도는 그의 상상력을 부추겼고, 그게 오해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소설은 1993년 애니 프루 이후 23년 만에 전미도서상과 퓰리처상을 동시에 받았으며, 심지어 뛰어난 대체역사 소설로 인정받아 SF 작품들에게만 주어지는 아서 클라크 상까지 받기에 이른다.

    상을 많이 받은 작품들이 대개 그렇듯(혹은 그냥 대부분의 소설이 그렇듯)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전복적인 작품은 아니다. 흑인 노예의 삶은 특별해보이지는 않는 사건과 묘사를 착실히 쌓아가면서 이루어진다. 콜슨 화이트헤드는 화려한 연출이 잘 통용되지 않는 19세기 인종 관련 문학 작품군의 전례를 충실히 따르는 듯하다. 그런데 이 흐름이 비밀 지하철도라는 대체역사적 소재와 만나는 순간 독특한 분위기가 태어난다. 이 지하철도 또한 미국의 대체역사 SF라는 흐름에서 보면 특별하지는 않은데, 앞서 전개 중이던 분위기와 충돌하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얻어낸다. 그리고 여기에 전통적인 컨셉트의 추적극이 더해진다.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추적극, 노예제도에 얽힌 드라마, 대체역사적 장치들은 모두 미국 소설들이 오랫동안 다듬어 온 주제이며, 이 여러 장르의 전통적 요소들을 성공적으로 결합한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그래서 미국 문학이라는 일종의 '역사'에 대한 오마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이런 점에서 특히 상을 많이 받을 만하다). 무척 영리한 소설로, 흥미로운 이야기를 원하는 전통적인 소설 팬들은 아마도 이 작품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 복제인간 윤봉구
    임은하 (지은이), 정용환 (그림) | 비룡소 | 2017년 9월 "2017년 제5회 스토리킹 수상작"

    "나는 네가 복제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봉구네 아파트 우편함으로 날아든 익명의 편지 한통이 평화롭던 일상을 뒤흔든다. 세계 최고의 짜장면 요리사를 꿈꾸며 춘장 맛집 '진짜루'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는 12살 윤봉구, 헤어스타일만 빼면 동생과 쌍둥이처럼 꼭 닮은 형 윤민구, 봉구 형제의 엄마이자 천재 과학자인 윤인주 박사. 평범한 초등학생으로 살아오다 느닷없이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으로 지목된 한 소년과 그 가족들은 혼란에 빠지고, 알 수 없는 누군가는 봉구 가족의 비밀을 폭로하려고 한다. 일촉즉발 위기에 처한 봉구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고, 그런 봉구 곁을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 한다.

    국내 최초로 어린이 심사위원제를 도입한 스토리킹 문학상 공모전의 다섯 번째 수상작이다. 논쟁적인 과학적 소재가 다양한 토론 거리를 만들어주는 한편 눈시울 뜨거워지는 진한 가족애를 느끼게 한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서로 사랑 받고 아껴 주기 위해서임을 잊지 말라는 듯이. 과연 어디까지 인류의 삶을 바꿀지 모를 과학의 발전 앞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을 진짜 가치를 기억하라는 듯이. 복제인간 윤봉구는 무엇보다 본인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아이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무엇을 할 때 누구와 함께 있을 때 행복한지 이 동화를 읽는 내내 떠올려보게 될 것이다.

  •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강상중 (지은이), 노수경 (옮긴이) | 사계절 | 2017년 9월 "묻고 생각하지 않으면 달라지지 않는 일"

    오늘날 일은 이 책의 제목처럼 그로부터 나를 지켜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일에서 나를 찾고, 일에서 나를 확인하고, 일에서 나를 이루는 아름다운 세계가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생계 유지부터 자아실현까지 일의 넓고 깊은 가능성은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서, 일과 삶을 완전히 분리하고는 일을 일의 영역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애쓰는 데 이르렀다. 일이 너무 많은 영역을 잡아먹었을 때의 반작용이기도 하겠으나, 시대가 바뀌며 일의 역할과 의미가 달라진 때문이기도 하겠다.

    ‘사회-의사’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 지식인 강상중은 오늘날 일이 처한 상황을 차분하게 진단하고 나름의 처방을 전한다. 처방전의 핵심 내용은 일의 의미를 생각해볼 것, 다양한 시점을 가질 것, 인문학을 배울 것이다. 언뜻 보면 너무 만병통치약 같지만, 이를 통해 바로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을 얻을 수는 없다. 강상중은 자이니치로 살아오며 겪은 일과의 갈등을 고백하며, 이 처방전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를 진솔하게 전한다. 과연 이 처방전이 오늘날에도 유효할지, 어떻게 각자에 맞게 사용할 수 있을지, 일로 고민하고 일과 마주하며 다른 일과 다른 삶을 꿈꾸는 이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기대한다.

9.82017
  • 문명과 전쟁
    아자 가트 (지은이), 오숙은, 이재만 (옮긴이) | 교유서가 | 2017년 9월 "전쟁의 수수께끼에 도전하다"

    인류 역사에서 전쟁만큼 복잡하고 방대한 주제가 있을까. 문명 이전부터 다툼을 시작한 인류는 문명을 바탕으로 전쟁의 규모를 키웠고 때로는 문명을 지켜야 한다며 전쟁을 벌이기도 한다. 대다수가 전쟁을 벌이지 말아야 한다는 데 동의하지만, 동시에 끊임없이 전쟁을 준비하거나 대비하는 게 현실이다. 상황이 이러니 정말 전쟁 없는 인류는 불가능한지, 오히려 전쟁이 문명과 인류의 발전에 기여하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드는데, 물론 이 와중에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 평생 전쟁을 겪으며 살아온 정치학자 아자 가트는 전쟁사의 범위를 인류의 역사 전체로 넓혀 설명한다. 우선 200만 년이라는 넓은 시선으로 정말 인류의 본성이 전쟁을 부추기는지 살펴보고, 다음으로 농업과 목축 등 문명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앞서 확인한 본성과 문명이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전쟁을 일으켰는지 파헤친다. 마지막으로 근대에 접어들며 폭발적으로 발전하는 기술 문명이 불러온 전쟁의 참상을 전하며, 모든 게 남아도는 시대에 왜 전쟁이 계속되는지 다시 인간 본성과 연결하여 짚어본다.

    1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세 가지 시대구분이 각각 완결성을 가진 터라 마치 트릴로지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개별 전쟁을 다루는 전쟁사의 장쾌함이나 세밀함보다는, 전쟁을 일으킨 이들의 욕망이 무엇이고 이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조화되는지 들여다보는 게 매력이라, 같은 인류로서 공감과 반발을 오가는 긴장감 넘치는 독서 체험을 하게 되는데, 그러다 주변을 둘러보면 여기도 전쟁터구나 싶어 다시 전쟁의 수수께끼에 빠져들게 된다. 정말 전쟁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 소비의 역사
    설혜심 (지은이) | 휴머니스트 | 2017년 8월 "마침내 도착한 소비의 경전"

    무엇을 사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세상, 무엇을 사는 일이 가장 쉬운 일로 꼽히는 세상이다(물론 돈이 있다면 말이다.). 소비하는 이들은 최고로 대접을 받(는 듯 보이)고, 조금이라도 쉽고 편하게 소비할 수 있는 방법들이 끊임없이 나온다.(재앙이다.) 이렇듯 소비문화가 오늘날 인류의 가장 중요하고 고유한 활동으로 자리를 잡으니, 시발비용이나 탕진잼처럼 다양한 소비형태를 일컫는 신조어도 쏟아진다.(이 말들의 뜻을 모른다면, 아직 더 소비해도 괜찮다.) 그런데 이렇게 ‘소비하는 인간’이 불현듯 탄생했을까? 아니다, 우리에게도 찬란한 역사와 전통이 있고, 이제 그 이야기를 들어보려 한다.

    역사학자 설혜심은 소비를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다양한 풍경을 상품, 판매, 소비자, 판촉 등으로 나눠 설명하는데, 신부의 드레스가 신랑의 턱시도보다 비싼 이유, 포르노로 읽힌 근대 초 의학서의 비밀, 카탈로그 판매로 시작된 홈쇼핑의 발전사까지, 그간 소비자를 매혹시킨 갖가지 숨은 역사가 드디어 빛을 발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애국소비와 소비자 운동 등 소비의 정치성까지 함께 다루니, 잠시 멈추고 나의 소비를 들여다볼 계기로 삼을 만하고, 욕망의 평등화와 소비의 평등화를 고민하는 지점에서는, 급여명세서와 카드명세서를 번갈아 보게 된다. 고민이 깊겠지만, 이 책은 소비해야 한다. 우리의 소비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서!

  • 모르는 사람들
    이승우 (지은이) | 문학동네 | 2017년 8월 "이 세상은 견디는 것이다" 이승우 소설집"

    십일 년 전 건설회사 중역으로 근무하던 아버지가 사라졌다. 언젠가 아버지가 말했던 '이 세상은 견디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에겐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증발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는 가장 쉽고 위험한 방법'으로 이해하려 한다. '이해할 수 있는 것만 이해하는' 것으로. 어머니는 아버지가 회사 광고모델과 해외로 떠났다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고 망상한다. 그리고 십일년 후 전해진 아버지의 부고. 아프리카 레소토에서 아버지는 어떻게 남은 생을 보냈고, 어떻게 생을 마쳤을까? <모르는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가장 멀리 있는 사람, 가장 모르는 사람들의, 불현듯 발견된 그 모르는 얼굴에 관해 이야기한다.

    납득할 수 없는 인생의 원리,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도 피할 수 없는 오해와 충돌, 나를 쥐고 흔드는 알 수 없는 시선.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품어오던 의문 같은 것들. 시대의 간섭과 불화하는 이들이 토로하는 부조리함. '매일 쓴다'는 것으로 인생의 의무를 이행한다고 말하는 소설가 이승우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철저하게 통제하여 독자의 앞에 완성된 결과물을 내놓는다. 정성스럽게 차려놓은 상찬을 받아든 이상, 읽는 것 말고는 해야 할 일이 없다. 그저 이승우의 소설 속으로 걸어들어갈 일이다.

  • 2019 부의 대절벽
    해리 덴트 (지은이), 안종희 (옮긴이) | 청림출판 | 2017년 9월 "경기 순환을 기회로 활용하는 법"

    전작 <2018 인구 절벽이 온다>에서 '인구 절벽Demographic Cliff'이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키며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인한 세계 경제의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경고했던 경제 예측가 해리 덴트의 신작이다. 예측가의 숙명이 그렇듯 때때로 그 예측이 빗나가기도 했지만 오랜 시간 주기와 함께 숨 쉬며 살아왔다는 그의 자신감, 즉 주기에 대한 확신은 대단하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주기를 따른다는 것이다. 물론 그는 예언가가 아니다. 주기 연구의 속성상 어느 특정한 시기가 언급될 수밖에 없는데, 종말이 12월 21일인지 22일인지를 따지기보다는 이런 식이면 곧 붕괴에 직면할 것이라는 다급한 메시지를 읽어내는 게 더 중요한 일이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점진적이고 직선적인 미래를 그린다. 급격한 기하급수적 변화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인간의 본성은 버블을 발견하는 데 취약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더 큰 문제는 전문가들이 버블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그는 강조한다. 주기 반대론자들은 호황일 때 더 큰 호황을 예상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쪽을 더 좋아하고 믿는다. 저자는 곧 인고의 시간이 온다며 일침을 가한다. 물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서 제목부터가 그렇다. 오르고 내리는 경기의 순환을 잘 이용한다면 버블의 붕괴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책이 제시하는 버블의 일곱 가지 원리를 알아두는 것이 어쩌면 큰 도움이 될 지도 모를 일이다.

9.122017
  • 다산의 제자 교육법
    정민 (지은이) | 휴머니스트 | 2017년 9월 "상황은 다르지만, 가르침과 배움의 방향은 같다"

    다산 정약용은 평생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오늘의 삶으로는 평생 읽어내기에도 벅찬 분량이다. 이 가운데 오늘날 다시 꺼내 읽어볼 글을 고른다면, 아마도 그가 제자들에게 남긴 증언(證言)이 꼽히지 않을까 싶다. 증언은 그가 제자의 성향과 상황에 맞춰 명심해야 할 가르침을 써준 글로, 그때그때 필요할 때 전했기에 자투리 종이와 천에 남겨진 글이 많고, 질책과 칭찬, 핀잔과 상찬이 뒤섞여, 괜히(?) 움츠러들었다가 슬그머니 칭찬받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각각의 제자에게 그에 맞춘 가르침을 전했기에 남겨진 증언첩에는 별다른 갈래가 없다. 다산의 글을 꾸준히 발굴하여 소개한 정민 교수는, 이 증언첩을 가려 모아 학문에 임하는 자세와 각오를 다져주려 쓴 글, 공부의 차례와 텍스트별 공부의 요령을 설명한 글 등으로 나눠 정리한다. “공부할 때 꼭 자세를 바로 하고 무릎을 꿇어야만 합니까? 그냥 편한 자세로 공부하면 안 되나요?”라고 묻는 제자에게 단칼에 “안 되네.”라고 답할 때면 숨이 턱 막히다가도, 재정이 튼튼해야 공부에 몰두할 수 있다며 "목구멍에 풀칠하는 일은 힘들어도 참아야 하고 수틀려도 견뎌야 한다."는 조언에서는 다산의 현실감각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가르침과 배움에 허덕이는 오늘의 스승과 제자에게도, 상황은 다르지만 여전한 가르침과 배움의 방향을 전하는 책이다.

  • 빛 혹은 그림자
    로런스 블록, 로버트 올렌 버틀러, 마이클 코널리, 스티븐 킹, 조이스 캐롤 오츠, 크레이그 퍼거슨, 니컬러스 크리스토퍼, 크리스 넬스콧, 조나선 샌틀로퍼, 메건 애벗, 리 차일드, 제프리 디버, 워런 무어, 조 R. 랜스데일, 게일 레빈, 저스틴 스콧, 질 D. 블록 (지은이), 로런스 블록 (엮은이), 이진 (옮긴이) | 문학동네 | 2017년 9월 "에드워드 호퍼, 소설이 되다"

    화려한 수상 이력을 자랑하는 미국 범죄 스릴러의 거장 로런스 블록. 그가 동료들-역시 영미권에서 대단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가들-을 한데 모아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소재로 소설집을 냈다. 서문에 따르면 호퍼는 휘트니 미술관을 자주 방문하는 미술 애호가인 듯하다. 미국의 미술 애호가가 에드워드 호퍼를 좋아하는 건 꽤 자연스러운 일이다. 블록은 이 소설집의 기획이 그냥 거기에 있었다고 말하는데, 그러니까 그건 '팬심'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빛 혹은 그림자>는 최고 수준의 작가들이 참여한 에드워드 호퍼 2차 창작물인 셈이다. 재미있는 기획이다.

    수록된 작품들의 분위기는 제각각이다. 무엇보다 각 작가들의 다양한 개성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에서 읽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그만큼 다양하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림 속 인물의 웃음에서 광기를 읽어낸 작가도 있고, 무표정하게 창밖을 바라보는 사람(호퍼의 그림에 이런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지)의 시선에서 권태를 감지한 작가가 있는가 하면 불안과 두려움을 포착한 작가도 있다. 이렇게 포착된 분위기들은 다시 여러 장르의 이야기로 탄생한다. 작가들의 구성상 스릴러를 기반으로 한 단편들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그와 거리가 먼 작품들도 다수 포함돼 있다. 그림에서 시작된 이야기들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일관된 기조를 가진 단편집보다는 이런 다양한 분위기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짧은 이야기를 한 편씩 읽어가도 좋고, 책을 기획한 로런스 블록의 말처럼 한 번에 이어서 읽어도 무방하다. 즐거운 독서가 될 것이다.

  • 언어 공부
    롬브 커토 (지은이), 신견식 (옮긴이) | 바다출판사 | 2017년 9월 "언어와 친해지고, 인생이 즐거워진다"

    외국어를 공부하다 보면, 해당 언어의 어휘와 문법보다 궁금해지는 것들이 있다. 나는 재능이 없어 이렇게 힘든 걸까, 어디까지 배워야 만족하게 될까, 지금 공부하는 방법이 정말 효과적인 걸까. 공부가 생각처럼 순조롭지 않거나 외국어 공부의 벽이 예상보다 높아 자꾸 생각이 주변으로 흩어지는 거라 반성하며, 다시 시선을 어휘와 문법으로 돌려세우려 노력하는 일이 반복되곤 한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언어 공부의 주변이 아니라 언어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함께 풀어가야 할 자연스러운 과제가 아닐까.

    16개 언어를 구사하며 통역가로 활동한 롬브 커토는 언어를 배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고 전제하며 스스로 언어를 배우면서 익힌 여러 유용한 원칙들을 전한다. 이 원칙들은 언어 학습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라 언어를 통해 바뀌는 자신과 언어를 거쳐 새롭게 보게 되는 세계를 포괄한다. 그는 "언어를 아는 일은 교양인이 되는 과정의 일부"라 정의하는데, 여든여섯 살까지 히브리어를 공부하다가 아흔넷에 세상을 떠난 그의 언어 이력을 보면, 16개 언어 구사라는 수식이 오히려 아쉽게 느껴질 정도다. 외국어 공부가 전하는 부담을, 나를 바꾸고 세계를 이해하는 새로운 기회로 바꿀 수 있다면, 언어 공부와 인생 모두가 즐거워지지 않을까. 이 책이 그 확실한 증거다.

  • 그림으로 글쓰기
    유리 슐레비츠 (지은이), 김난령 (옮긴이) | 다산기획 | 2017년 8월 "작가와 지망생을 위한 그림책 창작의 모든 것"

    좋은 스토리텔링의 원칙부터 포트폴리오 준비까지, 그림책 창작의 전 과정을 가르치는 교재. 칼데콧 상을 네 차례 수상한 거장 '유리 슐레비츠'가 자신의 창작 및 교육 경험을 집대성했다. 뛰어난 일러스트레이션의 내용과 형식, 독자란 어떤 존재들이며 그림책 작가는 독자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다. 저자가 직접 밝힌 것처럼 그림책 작가와 창작을 희망하는 이들의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이 책은 씌어졌다. 초보자들이 겪기 쉬운 시행착오와 프로 작가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를 최소화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장차 일러스트레이터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탁월한 본보기가 될 600여 개 이상의 그림과 사진 자료를 철저히 해부하면서 그림책 창작의 모든 단계를 설명한다. 지면의 한계를 극복하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언어를 사용하기에, 그 분석의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꽤 흥미롭다. 드로잉의 기초와 테크닉 연습, 참고자료의 다양한 활용 방법, 스토리보드와 가제본 만들기, 더욱 좋은 책을 계획하고 디자인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할 책의 물리적인 구조까지 다루었다. 책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의 하나는 바로 '디테일'이다. 중요한 디테일과 중요하지 않은 디테일의 사용이 좋은 그림책이냐 아니냐를 결정 짓는다는 것을, 이야기가 사실성과 독창성을 지니기 위한 토대 역시 디테일임을 거듭해서 강조한다.

    유리 슐레비츠는 명료함과 독창성을 가진 뛰어난 그림책 작가이자, 수많은 그림책 작가들이 존경해마지않는 위대한 스승이기도 했다. <그림으로 글쓰기>는 그의 확고한 예술관과 예리한 통찰, 동료와 후배 작가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명감으로 완성되었다. 1983년 출간되어 30년이 훌쩍 지난 오늘날까지 이 책이 그림책 창작 분야 최고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다. 그림책 작가를 꿈꾸는 이들이라면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이끌어내 줄 일생일대의 기회를 손에 넣기 바란다.

9.152017
  • 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지은이) | 동아시아 | 2017년 9월 "나와 모두를 함께 지키고 구하는 방법"

    “아프면 나만 손해.” “자기 몸은 스스로 챙겨야.” 몸과 건강에 대한 한국사회의 상식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나만큼 내 건강을 살필 사람은 없고, 고통은 나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으니, 스스로 잘 챙기며 아프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런데 복잡하게 연결된 사회에서 살다 보면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질 수 있고, 나에게 어떠한 잘못도 없지만 함께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을 만날 수도 있다. 대체로 각각의 개인은 이런 사회의 전제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임에도, 각자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으로 이야기가 끝나곤 한다.

    보건학자 김승섭은 그 끝에서 새롭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재소자, 결혼이주여성, 비정규직 노동자,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의 건강이, 그들을 대하는 사회의 감정과 제도에 얼마나 영향을 받는지 밝히면서, 몸과 건강의 문제를 바라볼 때에도 사회의 구조적 원인을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회역학'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이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음을 명확히 밝히며, 서로의 존재가 연결될수록 각자가, 더불어 사회가 건강해질 수 있다는 새로운 관점을 전하고 있다. 사회적 상처가 인간의 몸속에 남아 수십, 수백 년 동안 이어지듯, 사회의 배려와 기쁨, 따스함 역시 마찬가지 힘을 갖고 있지 않을까. 더 늦기 전에 나와 모두를 함께 지키고 구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다.

  • 멜랑콜리의 묘약
    레이 브래드버리 (지은이), 이주혜 (옮긴이) | 아작 | 2017년 9월 "가을에 읽기 좋은 꿈들"

    수십 년 전에 해적판으로 나왔던 <멜랑콜리의 묘약>이 새로운 번역으로 정식 출간되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유명 단편들을 다수 수록한 작품집으로, 함께 나온 <온 여름을 이 하루에>까지 포함하면 이전 판본에 실리지 않았던 작품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오래된 TV 시리즈 '환상특급'이나 최근의 '기묘한 이야기'와 같은 소재들이 자주 등장하는 가운데 이를 엮어가는 문장들은 늘 낭만적이다. 브래드버리의 세계에서 과학과 환상은 한데 버무러져 꿈과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촉매가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화성에 앉아 지구를 바라본 시인이라고 불렀다. 이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연작소설집 <화성 연대기>가 불러일으킨 연상이지만, 브래드버리가 창조한 화성의 고독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은 그의 작품세계를 대표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멜랑콜리의 묘약>에는 이 화성 연대기를 잉태한 슬픈 단편 '백만 년 동안의 소풍'이 들어가 있다. 그리고 40년 동안 늙지 않아서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삼 년 마다 이사를 다녀야 하는 소년의 이야기도 있다. 아이스크림색 양복에 얽힌 로알드 달 풍의 단편은 진짜 웃긴다. 수 년 동안 비가 내린 금성에서 태어나 해가 뜬다는 걸 모르는 아이들이 일출을 마주하는 순간을 다룬 이야기도 있다. 브래드버리는 이렇듯 기발한 설정으로 시작해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책을 읽고 나면 스티븐 스필버그가 왜 브래드버리에게 그토록 찬사를 보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간결하고 확실하게 전달되는 감정의 움직임들이 각별하다. 그래서인가, 브래드버리를 읽기에는 아무래도 가을이 가장 좋은 계절인 것 같다.

  • 5초의 법칙
    멜 로빈스 (지은이), 정미화 (옮긴이) | 한빛비즈 | 2017년 9월 "준비되기 전에 시작하라"

    우주선 발사 직전의 카운트다운에서 영감을 받아 집필했다는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숫자 5부터 거꾸로 다섯을 센 다음 바로 시작하라는 아주 단순한 메시지를 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냥 시작하면 되는 일을 무슨 책을 읽어가면서까지 하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5초만에 이 책을 읽지 않기로 결심해서는 곤란하다. 그 결정만큼은 조금 미루고 곰곰이 생각해 보자. 평소 알람을 여러 번 맞춰 놓지는 않는지,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불안해지지는 않는지, 공부하기 전에 책상 정리부터 하지는 않는지, 바닥으로 떨어진 자신감 때문에 좋은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는지, 고백하지 못한 것을 밤새워 고민하지는 않았는지를 말이다.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그럴 기분이 아니라면, 공포와 불안이 가시질 않는다면 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자. 5초의 법칙은 마음을 다스리는 데도 유용하다. CNN 방송 진행자인 저자 역시도 무대 뒤에서는 긴장을 멈출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문제를 극복하고 변화에 성공한 이들의 경험담은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용기를 준다. 그런데 사실, 다섯을 세고 시작하라는 것도 막상 상황이 닥치면 쉽게 따라하기 힘들다. 동기부여 책들이 많은 사랑을 받는 건 무언가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시작을 준비하지 말 것'이라는 글귀를 기억해 두고 싶다. 물론, 시작을 준비하기 위한 독서는 예외다.

  • 소년아, 나를 꺼내 줘
    김진나 (지은이) | 사계절 | 2017년 8월 "2017 사계절문학상 대상"

    '주변 사람들은 내가 작년과 올해 아주 다르다고 했다.' 열여덟, 여름을 유난스럽게 통과중인 소녀 시지. 잘 웃지도 않던 소녀가 엄마와 함께 엄마 친구를 만나러 간 대학로에서 어린 시절 알았던 엄마 친구의 아들 '얼'을 만나게 된다. 바다거북 그림을 보며 얼이 들려준, '카벙클'이라는 임시치아로 입에서 피가 나도록 알의 내벽을 깨야 비로소 탄생하는 새끼 거북이의 이야기. 이야기를 하는 얼의 환한 미소를 보며, 소녀는 비로소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려지는 소녀의 마음 속 작용들. 소녀가 소년을 기다리는 시간이 1일에서 열흘+51일이 되기까지, 사건은 오직 소녀의 마음 안에서 일어난다. 소년을 깨우고자 다가가는 것은 실은 소녀의 몫이다. 새끼 거북이처럼 스스로 자신의 알을 두드리고 있던 소녀의 이야기가 참신한 묘사로 우아하게 펼쳐진다. <디디와 소풍 요정>으로 2016년 비룡소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김진나의 청소년 소설. 2017년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9.192017
  • 은유가 된 독자
    알베르토 망겔 (지은이), 양병찬 (옮긴이) | 행성B(행성비) | 2017년 9월 "독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당신이 증거다"

    제목을 보고 당황했다. 독자가 점차 줄어든다더니 정말 사라져버린 걸까 싶어서다. 그런데 정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과연 우리 시대에 독자로부터 공통의 메타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갖고 앞선 시대를 돌아보면,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로 여겨졌던 ‘은유로서의 독자’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물론 모두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독서하는 피조물이라 부르는 알베르트 망구엘의 눈에 비친 독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는 한때의 독자를 만날 수 있다.

    알베르트 망구엘은 전작 <독서의 역사>에서 독서 행위에 주목하며 책에 대한 인류의 갈망을 그려냈는데, 이번 책에서는 책을 읽는 사람, 독자에 주목하여 자신의 독서 이력을 뒤지며 재구성한다. 그렇게 드러난 독자의 모습은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다. 책을 세계로 이해하고 그 속을 거니는 여행자, 그와는 반대로 좁은 탑에 숨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은둔자, 마지막으로 책을 먹어 치우듯 읽어내는 책벌레다. 이 셋 중에 자신의 모습이 없다면, 다행이다. 바로 이 책이 찾아헤맨 오늘날 '은유로서의 독자'가 당신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멸종하기 전에 만나서 반갑고 기쁘다. 이제 종족 보전을 위해 더 열심히 책을 읽을 일만 남았다.

  • 여자의 미래
    신미남 (지은이) | 다산북스 | 2017년 9월 "결국 우리 모두의 미래를 위하여"

    나는 남자다. 이 책을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 책에 공감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책은 여자가 스스로 일터를 떠나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예전처럼 일하는 여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여자들은 출산과 육아, 유리천장이라 불리는 보이지 않는 불평등, 그리고 스스로 여자의 역할에 한계를 두는 심리적 장벽 때문에 일을 그만둔다. 아들 둘을 키워 낸 워킹맘으로 유리천장을 깨고 CEO에 오른 저자가 힘주어 말하는 부분은 의외로 세 번째, 심리적 장벽이다.

    이 책은 사장님의 잔소리나 훈계가 아니다. 화려한 경력만큼 고민의 골도 깊었을 저자는 여성 리더로서 그 고민의 최전선에서 여자의 미래를 함께 논한다. 여자들이 심리적 장벽을 극복하고 여자의 본성을 새 시대에 걸맞게 극대화할 수 있도록 돕는다. 남자로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완전히 공감할 수는 없는 여자의 일, 삶, 그리고 미래. 경력이 단절된 아내, 저자처럼 아들 둘을 둔 팀장님, 역시 아들 둘 때문에 고생하신 엄마를 떠올리며 책의 이야기에 다시 귀를 기울여 본다.

  • 온갖 무례와 오지랖을 뒤로하고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기
    화사 외 42인 (지은이), 한국여성민우회 (엮은이) | 궁리 | 2017년 9월 "페미니스트로 살아가는 것이 고민될 때"

    페미니즘 관련 행사가 벌어지는 날이면 나는 옷장에서 ‘Girls Do Not Need A Prince’가 새겨진 티셔츠를 꺼내 입는다. 보란 듯이 가슴을 펴고 문구를 뽐내고 싶은 마음에 설레기도 하고, 같은 티셔츠를 입고 나온 이들을 만날 기대에 부풀기도 한다. 그런데 내 친구는 그 티셔츠를 입고 바깥에 나오면 신경이 쓰인다고 한다.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해 공격성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어 조심스럽다는 이야기다. 나는 남성이고 내 친구는 여성이다.

    페미니즘을 표현하거나 페미니스트라고 드러내는 일은 이렇듯 상황에 따라 간단치 않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믿는 이들은 때때로 "차라리 페미니즘을 몰랐다면"이라는 가정을 해보기도 한다지만, 역시 되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의 믿음을 지키면서 그 믿음을 주변과 나누고 그리하여 함께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책에는 앞서 고민하고 경험하고 도전하고 좌절하고 그럼에도 여전히 페미니스트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각각의 이야기지만 우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혼자가 아니라 함께임을, 그리하여 더 길고 멀게 나아갈 수 있음을 확인하는 용기를 만날 수 있다. 가자, 갈 수 있을 때까지.

  • 금강산 호랑이
    권정생 (지은이), 정승각 (그림) | 길벗어린이 | 2017년 9월 "권정생이 쓰고 정승각이 그린 우리 옛이야기"

    <강아지똥> 권정생, 정승각 작가의 글과 그림이 조화를 이루는 또 한 권의 그림책.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멀고 험한 여정을 떠나는 산골 소년 유복이의 이야기,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민간 설화 '금강산 호랑이'가 두 거장의 손에서 다시 태어났다. 작고 여린 소년이 고난과 역경을 헤치고 무서운 호랑이를 무찔러 평화로운 세상을 되찾는 가슴 뭉클한 이야기다. 2000년부터 시작해 무려 17년에 걸쳐 완성된 강렬한 일러스트가 경탄을 자아낸다.

    이름난 사냥꾼이었던 아버지는 사람을 해치는 호랑이를 없애기 위해 금강산으로 떠났다가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10년 동안의 부단한 노력과 어머니의 격려, 산신령의 도움은 '애비 없는 자식'이라 놀림 받던 소년을 그 누구보다 용감한 사내로 만들어주었다. 혼자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었던 일도 함께라면 달라진다. <금강산 호랑이>는 한 사람의 특별한 영웅이 아닌 여럿이 함께 힘을 합쳐 만들어가는 기적에 관한 이야기이다. 몸과 마음을 튼튼하게 단련할 동기를 부여해주고, 두려운 호랑이와 맞서 싸운 유복이처럼 커다란 용기도 심어줄 그런 그림책이다.

9.222017
  • 거미줄에 걸린 소녀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은이), 임호경 (옮긴이) | 문학동네 | 2017년 9월 "리스베트의 귀환, 다시 밀레니엄이다"

    1억 독자의 검증, 미국에서 2초에 1부씩 팔린 책, 북유럽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그 시리즈, 작가 스티그 라르손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멈춰있던 '밀레니엄'이 리스베트와 미카엘 커플의 이야기를 이어나갈 새로운 작가를 지명했다. "이상하지만 흥미로운 캐릭터인 리스베트 살란데르를 완전히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이제 그녀는 내 정맥 안에 있다."고 말하는 작가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시리즈의 네번째 이야기 <거미줄에 걸린 소녀>로 공격을 개시한다.

    고스락 팬 같은 기괴한 옷차림에 초등학생처럼 볼품없는 몸. 주위의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고, 위법과 불법을 넘나드는 방식으로 정보를 수집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 나가는 리스베트. 오래 전 사라진 쌍둥이 자매 카밀라를 떠올리게 하는 불길한 꿈을 꾸고 리스베트는 자신을 괴롭힌 과거의 그림자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서로를 증오하는 쌍둥이 자매의 대립과 밀레니엄다운 속도감 넘치는 이야기의 습격. 밀레니엄의 전설을 알린 이야기의 첫 제목이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이었다는 점은 2017년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리스베트 살란데르가 돌아왔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반드시, 새롭게 독자를 만나야 한다.

  • 엄마 반성문
    이유남 (지은이) | 덴스토리(Denstory) | 2017년 9월 "전교 1등 아들의 자퇴 선언, 수퍼맘은 없었다!"

    스스로에게도 엄격했고 유능했던 초등학교 교사인 저자는 자녀가 맡은 반 아이들보다 더, 가장 최고로 잘하는 아이들이길 바랐다. 사랑했기에, 잘 되기를 바랐기에 택했던 방법은 '부모'가 아니라 '감시자'의 역할이었다. 집 가훈은 ‘SKSK’, 시키면 시키는 대로. “얼른! 빨리! 바빠!”를 입에 달고 살면서, 아이들에게 늘 확인하고, 지시하고, 명령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의 마음은 헤아려 준 적이 없었고, 그렇게 잘난 아이들이 영원히 잘될 줄만 알았다.

    전교 1·2등을 다투던 고3 아들이 어느 봄날, 자퇴를 선언한다. 아들이 자퇴서에 도장을 찍자마자 고 2 딸도 학교를 그만두고, 자퇴생 남매는 방에 틀어박혀 부모와 대화조차 거부한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아이를 살리고 봐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시작한 코칭을 통해 아이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까지, 저자는 ‘무자격 부모’였던 자신의 부끄러웠던 과거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 거짓말을 먹는 나무
    프랜시스 하딩 (지은이), 박산호 (옮긴이)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나는 진실을 찾기 위해 거짓말을 할 것이다"

    19세기 영국. 14세 소녀 페이스는 명망 높은 과학자인 아버지가 새로운 화석 발굴을 위해 가게 된 외딴 섬으로 함께 이주한다. 그러나 이 이주는 사실 모종의 이유로 학계의 신뢰를 잃은 아버지의 도주에 가깝다. 그리고 낯선 삶에서 갑작스럽게 맞딱뜨린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죽음. 모두가 자살이라고 말하지만, 페이스는 살인이라고 확신한다. 아버지의 진실을 밝히고 가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페이스는 아버지의 '유품'인 거짓말 나무 앞에 선다. 거짓말을 들려주면 비밀을 속삭여주는 나무. 소녀는 진실을 찾기 위해 나무를 향해 거짓말을 속삭이고, 걷잡을 수 없는 거짓말이 태풍을 만들어 낸다.

    미스터리 소설인 동시에 판타지 소설이며 역사소설로도 읽힌다. 빅토리아 시대의 과학을 묘사하는 현실 감각과, '거짓말 나무'라는 환상적인 설정이 만들어내는 감각, 비밀을 밝히려는 용감한 소녀의 이미지가 교차하며 이 소설만의 독특한 분위기로 독자를 유혹한다. 영국 아마존 종합베스트 18주 연속 1위, 영국 코스타 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어거스트 러쉬> 제작자에 의해 영화 제작이 확정되었다.

  • 라곰
    롤라 오케르스트룀 (지은이), 하수정 (옮긴이)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9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라곰만 같아라"

    스웨덴 사람들도 설명을 못한다는 라곰에는 정확한 정의가 없다. '꼭 맞는', '딱 적당한' 정도로 적당히 번역된다. 그런데 그 적당함의 기준은 사람마다, 상황에 따라 다르다. 적당히 잘라달라고 하면 너무 짧아진 머리에 당황할 지도 모른다. 적당히 소금 간을 했는데 음식이 짜다고 구박도 받는다. 이때 필요한 것이 라곰이다. 라곰은 각자의 적당함이 균형을 이루는 이상적인 상태를 추구한다. 서로 만족하는 수준이 다른 상황 속에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최적의 지점을 찾아내는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블랙 커피를 선호하는 사람과 설탕 두 스푼을 넣는 사람이 함께 마셔야 할 '라곰 커피' 맛은 어때야 하는가? 설탕 한 스푼을 넣으면 될까?

    라곰은 적당히 가운데 지점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평균, 중간, 중립과는 다르다. 라곰은 나와 너, 일과 삶, 욕망과 필요 사이의 균형잡기며, 적절한 수준에 대한 사회적 합의다. 설탕 반 스푼을 넣었는데 각자 이 정도면 적절하다고 느꼈다면 그것이 바로 라곰이다. 라곰에 정답은 없다. 비우고 치우고 아무 것도 없는 방에서 살라는 미니멀 라이프보다 어려운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힌트는 책 속에 가득하다. 이 책을 보면 '라곰의 나라' 스웨덴 사람들이 왜 행복한지, 왜 라곰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로 주목받고 있는지 알 것 같다. 스웨덴 속담을 읊으며 행복에 한 발짝 다가가 본다. 라곰 애르 베스트(Lagom är, bäst), 라곰이 최고다.

9.262017
  • 바다는 잘 있습니다
    이병률 (지은이)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9월 "사랑에게 손을 뻗어 손을 달라고 했다"

    '눈사람 여관'으로 홀로 떠났던 이병률이 돌아왔다. <찬란>,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등의 시와 산문을 통해 떠나고 머무르는 사연들, 그 정결한 감상에 대해 말해오던 시인이 2013년 이후 발표한 시 60편을 소개한다.

    이병률의 시, 혼자 있고, 이미 떠나왔고, 지나간 자리에서 가만히 이야기한다. 감정은 이미 끝났고, 속절없는 감상만 남아 있다. 그러나 고됨을 알면서도 차마 포기하지 못하는 어떤 정서들. "내게 공중에 버려지는 고된 기분을 / 여러 번 알리러 와준 그 사람을 / 지금 다시 찾으러 가겠다고 길을 나서고 있는 나를 / 나는 어쩔 것인가요" (<그 사람은 여기 없습니다> 中)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마음들을 언어로 묘사할 방법을 찾고 싶을 때, 이병률의 시집에서 그 말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대량살상수학무기
    캐시 오닐 (지은이), 김정혜 (옮긴이) | 흐름출판 | 2017년 9월 "알고리즘과 빅데이터는 디지털 골상학"

    이제 직감은 설 곳이 없다. 기업에서 아직도 직감을 내세울 수 있는 이는 사장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숫자로 근거를 마련해야 한다. 겉으로 보면 합리적 의사결정으로 보인다. 그런데 근거가 되는 숫자를 확인하거나 검토하는 경우는 드물다. 이미 계산된 결과이니 그 자체로 신뢰를 얻고 그대로 결정이 되곤 한다. 이게 합리적이냐고 되묻는다면 아마 쉽게 답하지 못하겠지만, 일일이 살펴보기에는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고 넓어진다는 분명한 근거를 바탕으로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있겠다.

    이제 빅데이터가 적용되지 않는 곳은 없다. 기업뿐 아니라 정부의 정책 결정이나 대학의 학생 선발 등 비교와 평가가 필요한 모든 영역에서 빅데이터를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적용한 결과가 가장 정확하고 믿을 만하다고 인정받는다. 이 책은 이런 태도에 경종을 울린다. 수학박사이자 데이터과학자로 명성을 떨친 저자는 일종의 내부고발자가 되어 빅데이터의 허술함과 알고리즘의 한계를 낱낱이 고발한다. 과거 골상학이 인종을 차별하는 근거로 사용되었듯, 오늘날 빅데이터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믿기 어렵다고? 아마 당시 골상학을 믿는 이들도 마찬가지 반응이었을 터, 대량살상수학무기로 변신한 알고리즘의 파괴와 위협을 확인한다면, 세상을 이해하는 새로운 기준과 근거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말 그릇 (50만 부 기념 에디션)
    김윤나 (지은이) | 오아시스 | 2017년 9월 "그릇된 말 그릇을 다듬는 법"

    같은 음식이라도 예쁜 그릇에 담으면 더 맛있어 보인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말도 예쁜 그릇에 담아 본다. 넘쳐나는 '말투' 관련 책들의 도움도 받는다. 그럼에도 말은 좀처럼 늘지 않는다. 계속되는 말실수만큼 상처 받는 사람도 늘어만 간다. 무엇이 문제일까? 이 책은 아무리 좋은 말들을 주워 담으려 한들 말 그릇이 작으면 다 소용 없는 일이라고 일갈한다. 그릇의 모양도, 그 안에 담긴 내용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릇의 크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릇은 충분히 단단해야 한다.

    그릇에는 어떤 일을 해 나갈 만한 능력이나 도량 또는 그런 능력이나 도량을 가진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사전적 의미가 있다. 결국 나의 말 그릇은 나라는 사람의 됨됨이 그 자체다. 나의 말에서 마음이 느껴지는가? 나의 말을 주도하고 있는 것은 나인가, 내 안의 상처인가? 나는 내가 한 말의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인가? 책은 말을 담고 내뱉는 사람의 내면에 초점을 맞춘다. 그렇다고 대화 기술을 도외시하지는 않는다. 그릇을 키워 담아내야 할 것은 결국 좋은 말들이기 때문이다.

  • 북숍 스토리
    젠 캠벨 (지은이), 조동섭 (옮긴이) | 아날로그(글담) | 2017년 9월 "좋은 서점은 늘 관습에 대항해야 해요"

    “어떤 서점이 자신의 취향에 맞을지 아닐지는 서점에 한 발만 들여놓아도 알 수 있다.” 서점에서 일하는 이에게 이만큼 무서운 말이 있을까 싶지만, 서점에 들어서는 독자에게는 이 공간이 얼마나 놀랍고 신기한지 전하는 말 아닐까 싶다. 이 책에는 여섯 대륙에 걸친 300여 개의 서점과 그 서점을 오가는 사람, 그 서점에 놓인 책과 그 책을 쓴 사람 그리고 그들이 서점에 쌓은 시간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가득한데, 무엇보다 서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거라며 눈을 밝히는 작가 젠 캠벨의 따뜻한 시선이 우리를 반긴다.

    젠 캠벨은 런던의 앤티크 서점에서 일하는데, 서점에서 벌어지는 황당한 일을 엮은 책 <서점 손님들이 하는 이상한 말>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고, 서점이 여전히 의미가 있을지 해답을 찾으러 전 세계 수백 곳의 서점을 돌아다녔다. 정확하게 말하면 해답을 찾기보다는 자신의 믿음을 확인하는 과정이었을 텐데, 크게 다르지 않은 책을 팔면서 이렇게 각기 다른 마음으로 서점을 꾸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이야기를 읽으니, 자연스레 내가 어떤 마음으로 서점에서 책을 다루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 결과를 모두 풀어놓으려면 마찬가지로 책 한 권이 될 테니, 내게 와닿은 서점의 마음 하나를 적으며 짧은 감상을 마친다. "좋은 서점은 늘 관습에 대항해야 해요."

9.292017
  • 생각한다면 과학자처럼
    데이비드 헬펀드 (지은이), 노태복 (옮긴이) | 더퀘스트 | 2017년 9월 "이게 다 과학 덕분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과학 없이는 설명이 불가능하고, 과학을 빼면 무엇 하나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게 분명하다. 그만큼 과학에 의존하고 과학을 사용하며 살면서도, 막상 과학이라는 지식의 문턱 앞에서는 대개 망설이게 된다. 지식의 거대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학적 사고라는 게 여전히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만 겪는 특별한 상황은 아니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도 2013년이 되어서야 신입생 필수 교양강좌에 과학이 포함되었으니 말이다. 이 책은 그 강좌를 기획하고 운영하고 직접 강의를 맡아온 천문학자 데이비드 헬펀드의 강의록을 바탕으로 한다. 그는 항성 핵합성과 산책 가운데 어느 것을 하고 싶냐고 묻고는, 계획대로 산책에 나서 주변을 관찰하고 궁금증을 키우고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전한다. 물론 그 다음 수업 때 항성 핵합성에 바로 들어가며 과학 역시 예측 불가일 수 있다는 걸 확실하게 알려준다.

    이 강좌의 목표는 과학 지식을 쉽고 재미나게 전하는 데 있지 않다. 과학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풀어가는지, 그것이 오늘날 세계를 알아가고 자신의 삶을 꾸리는 데 왜 중요한지 알려주어, 과학적 태도와 과학적 사고를 습관으로 만들게 하는 게 최종 목표다. 이 과정을 마치면 뉴욕에 피아노 조율사가 몇 명인지, 당신의 집에 운석이 떨어질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서울시에서 지하철로 한 달에 얼마나 많은 기름을 절약할 수 있는지에 답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과학적 사고로 정답에 가까이 다가서는 일이니, 최소한 '틀리지 않는 법'은 확실하게 배웠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의 숱한 오류와 오답을 생각해보면, 이 정도로도 충분히 멋지고 훌륭한 수준이라 하겠다. 다 과학 덕분이다.

  •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도대체 (지은이) | 예담 | 2017년 9월 "도대체 작가의 유쾌한 인생기술"

    인삼밭에서 자신이 인삼이라고 굳게 믿으며 행복하게 사는 고구마. 인삼도 아니면서 행복해하는 고구마를 질투한 한 인삼이 고구마에게 정체를 알린다. 고구마는 그 사실을 알고 놀라긴 했으나 이내 고구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행복해한다. 짧고 간단하지만 왠지 모를 위로를 건네는 이 만화는 SNS 상에서 화제가 된 네 컷 만화 '행복한 고구마'의 줄거리다. '행복한 고구마'를 그린 도대체 작가의 위트 넘치는 그림과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작가는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어쩐지 웃기는 점을 발견해내는' 자신의 특기를 충분히 살려 다양한 에피소드와, 경험을 통해 터득한 삶의 기술을 유쾌하게 풀어낸다. 작가의 글에는 억지로 힘내라는 강요도, 쉬운 위로도 없다. 다만 무심한 그림과 담백한 글로 위기의 순간이 닥쳐와도 자신을 잘 지켜내는 법, 삶에서 소소한 재미를 찾는 법을 전한다.

  • 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은이), 권남희 (옮긴이)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달팽이 식당> 오가와 이토, 위로는 편지로"

    <달팽이 식당> 등의 소설을 통해 자신만의 다정한 방식으로 독자를 위로해온 오가와 이토 신작 소설. <슬램덩크> 속 강백호가 서있던 그 바닷가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네 자매가 거닐던 바닷가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익숙할, 평화로운 바닷마을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십일 대 째 영업중인 '츠바키 문구점'이 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문구점이지만 사실 이 가게의 본업은 대필. 에도 시대부터 여성 서사(書士)들이 가업인 '대필'을 수행하던 이 가게를 잇기 위해 이십대 후반의 '포포'가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자신을 혹독하게 수련시킨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좋지 못하다. 포포는 사별한 남편의 편지를 아직도 기다리는 노부인에게 천국의 남편이 보내는 것처럼 보내는 편지, 수술을 앞둔 남자가 자신은 잘 지내고 있으니 당신도 행복하라고 첫사랑에게 안부를 전하는 편지 등을 대필하며 그들의 편지를 쓰는 것이 곧 자신을 위로하는 일이 됨을 깨닫게 된다. 연필은 HB부터 10B까지 갖춰도 샤프펜슬은 절대 취급하지 않는 츠바키 문구점의 원칙. 사각사각 종이를 스치는 정성스러운 글자들이 스쳐지나가는 동안, 아름다운 가마쿠라의 평온한 정경과 함께,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생겨난다.

  • 딸에 대하여
    김혜진 (지은이) | 민음사 | 2017년 9월 "못내 외면하고 싶은 딸애의 사생활"

    여성들의 이야기. 엄마는 홀로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생계를 꾸린다. 너무 많은 것을 배워버린 탓에 '세상과 불화하는' 딸은 그린이라는 이름을 쓰며 레인이라는 이름의 여성과 7년째 연애하고 있다. 엄마가 돌보는 노인은 젠. 평생을 소외된 자들을 위해 헌신한 삶을 살았지만 지금은 돌볼 가족도 없는 치매노인일 뿐이다. 이 여성들의 삶, 사회의 표준 규격 바깥의 삶들, 변두리에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처지는 궁박하고, 삶은 위태롭기 짝이 없다.

    <중앙역>으로 중앙장편문학상을 수상한 김혜진의 장편소설. 레즈비언인 딸과 딸의 연인과 경제적 이유 때문에 동거를 시작한 이후, '엄마'는 비로소 자신을 둘러싼 혐오와 배제로 이루어진 세계를 발견한다. '못내 외면하고 싶은 딸애의 사생활'에서 고개를 돌리던 순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끊임없이 싸우고 견뎌야 하는 일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나아가기까지, 우리가 '같지 않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